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(문단 편집) === [[1945년]] 이전 외지 학교들의 고시엔 === [[1945년]] 패전 이전까지 [[일본 제국]] 영토였던 [[조선총독부|조선]]과 [[대만총독부|대만]], 그리고 조차지였던 [[관동주]] 등 외지의 각 지방에서도 지역 예선을 거친 대표 학교들이 고시엔에 진출했다.[* 가와니시 레이코, 《플레이볼》(양두원 옮김, 워크룸프레스 펴냄, 2017)] 당초 야구에 부정적이었던 [[조선총독부]]는 [[1919년]] [[사이토 마코토]] [[조선 총독|총독]]이 부임하고 [[문화통치]]를 표방하면서 각급 학교, 특히 [[보통학교]]와 [[고등보통학교]] 등 조선인 학교에 야구부를 창설하란 압박이 들어갔으며 고시엔 조선지구 예선이 열리게 되었다. 이에 따라 1921년 7월 조선지구 예선에서 대표로 선발된 [[개성고등학교 야구부|부산상업학교]]가 제7회 고시엔에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에서는 [[서울고등학교|경성중학교]](1922년, 1924년, 1926년, 1927년, 1928년), [[인천고등학교|인천상업학교]](1936년, 1938년, 1939년), 평양중학교(1929년, 1932년, 1940년[*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[[평양고등보통학교]]가 평양제2중학교로 개칭되면서 평양중학교는 평양제1중학교로 명칭을 변경하고 1940년 본선 진출.]), [[경기상업고등학교|경성상업학교]](1931년, 1934년), [[휘문고등학교|휘문고등보통학교]](1923년), [[부산고등학교|부산중학교]](1925년), [[대구상원고등학교|대구상업학교]](1930년), [[선린인터넷고등학교|선린상업학교]](1933년), 신의주상업학교(1935년), [[용산고등학교|용산중학교]](1937년) 등이 조선 대표로 고시엔에 진출했다. ||[[파일:고시엔3.png]]|| ||고시엔 박물관 내에 있는 출전 고교 기념구(좌) / 경성중학, 휘문 고보 출전 기념구(우))|| 이 중 최다 출전교인 [[서울고등학교 야구부|경성중학]]을 비롯해서 [[개성고등학교 야구부|부산상업]](1921년), [[휘문고등학교 야구부|휘문고보]](1923년), [[경기상업고등학교 야구부|경성상업]](1934년)은 8강에 올랐는데 특히 휘문고보는 선수 전원과 감독([[박석윤]])까지 선수단 전원이 조선인으로 구성된 야구부였다. 고시엔 본선 진출 학교 중 조선인으로만 이루어진 학교는 [[휘문고등학교 야구부|휘문고보]]가 유일하며, 1923년 고시엔 본선에서 휘문고보는 1회전은 부전승으로, 2회전에서 만주 대표인 대련(大連)상업학교를 9:4로 꺾었지만 8강에서 대만 대표로 나온 대북(臺北)1중학교를 23:4로 관광보내고 올라온 케이진 지구(교토부+시가현) 대표 리츠메이칸 중학교와 대결해 5:7로 패배하였다.[* 참고로 리츠메이칸 중학교는 준결승에서 그 해 우승팀인 효고현 대표 코요 중학교에 패배.] 그러나 휘문고보가 고시엔에 진출했을 당시 야구부를 지도했던 이가 [[친일인명사전]]에 [[친일반민족행위자]]로 등재된 [[박석윤]]이라 오늘날 한국 야구계에서는 1923년 휘문고의 활약을 언급하기를 꺼리며, 휘문의숙 재단 학교에서도 고시엔 출전 시절 역사와 박석윤은 잘 언급되지 않는다. 휘문고등학교 야구부 홈페이지에도 ‘1923년 고시엔에 참가했다’ 정도로만 나온다. [[대만일치시기|대만]]에서는 조선보다 일찍 일본에서 야구 열풍이 유입되었으나, 정작 고시엔 참가는 조금 더 늦은 1923년부터 이뤄졌다. 1922년 6월에 고시엔 주최사인 오사카 [[아사히신문]]의 중역 시모무라 히로시가 대만에도 고시엔 참가를 권유했고, 1923년 7월에 열린 제1회 대만지구 예선에서 우승한 대북일중(臺北一中)[* 현재의 타이베이시립 건국고등중학]이 제9회 고시엔에 출전하면서 대북제일중학교(1923년, 1929년, 1930년, 1938년, 1940년), 대북상업학교(1924년, 1926년, 1927년, 1934년), 가의농림학교(1931년, 1933년, 1935년, 1936년), 대북공업학교(1925년, 1928년, 1932년), 가의중학교(1937년, 1939년) 등이 고시엔에 참가했다. 1931년 제17회 고시엔에서 가의농림학교(嘉義農林學校, 現 국립자이대학의 전신) 야구부가 준우승을 한 것이 대만팀의 고시엔 최고 성적이다. 다른 학교들과 달리 가의농림학교에서는 대만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[[대만 원주민]]들까지 3개 민족이 어울려 오로지 실력으로 주전을 선발했는데, 특히 신체 능력이 뛰어난 [[대만 원주민]]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냈다. 1931년 고시엔 준우승을 계기로 대만에서 야구 붐이 일었다고 한다. 이 가의농림학교 야구단의 이야기는 KANO[* 가의농림학교(嘉義農林學校)의 준말 嘉農를 [[일본 한자음]]으로 읽은 것.]라는 영화(2014년)로 제작되어 히트를 치기도 했다. 관동주에서는 1921년 7월 [[여순공과대학]] 운동장에서 열린 만주지구 예선에서 [[구제중학교|여순중학교]](旅順中學校), 남만주공업학교(南滿洲工業學校) 등과 맞붙어 승리한 대련상업학교(大連商業學校)가 제7회 고시엔에 출전했고, 3승을 거두며 4강에 진출했으나 준결승에서 교토제일상업학교에 패배해 분루를 삼켰다. 1922년에는 대련상업학교와 쌍벽을 이뤘던 남만주공업학교가 지구예선에서 우승하고 고시엔에 출전했으나, 1925년 [[고등공업학교|공업전문학교]](고등교육기관인 [[구제전문학교]])로 승격되면서 중등학교야구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. 그에 따라 1923~1934년간 대련상업학교는 1929년(칭다오중학교 출전)을 제외하고 줄곧 고시엔 본선에 진출하며 1926년에는 준우승을 기록했으나, [[만주사변]]으로 전화가 높아가던 1935년 교우회비 절감을 명목으로 야구부를 해체하고 말았다. 여순중학교는 이미 상급학교 진학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이미 야구부를 해산한 상태였고, 남만주공업학교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에, 대련상업학교의 야구부 폐지는 결국 [[관동주]]에서 야구부를 보유한 중등학교 3개교가 전부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었다. 이후 만주지구에서는 1차 대전 후 일본 제국이 독일 제국의 조차지를 인수한 [[칭다오]]의 칭다오중학교가 1929년에 이어 1935~1937년 대표로 고시엔에 나갔고, 톈진상업학교(1938~1939년), 봉천상업학교(1940년) 등이 [[중일전쟁]]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시엔에 출전했다. 1940년 황기 2600년 기념 대회를 마지막으로 1941년부터 중단된 고시엔은 일본의 패전 후 재개되었지만 이 때는 이미 외지가 전부 분리되어 조선, 대만, 만주의 학교들은 더이상 참가할 수 없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